실험실 홀랑 태울뻔…日화장품 원료 국산화한 군산 중소기업

군산산업단지 태경SBC 공장 르포
지난해 12월 30일, 전북 군산 국가산업단지는 버려진 동네 마냥 고요했다. GM 군산공장 폐쇄 여파로 곳곳엔 집채만 한 공장 건물이 텅 비어 있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각종 자동차 부품을 쌓아놓았을 것 같은 공장 내 공터엔 잡초만 무성했다. 정적이 감돌던 산단 사이로 “땅땅”하는 망치 소리가 울렸다. 망치 소리를 쫓아가니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태경SBC 제2공장 부지가 보였다. 정문을 지나 공장 안으로 들어가자 인부가 탄 고소작업 차량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동안 깎았던 직원 월급을 이제야 좀 보전해 줄 수 있게 됐어요.”
공장에서 만난 신태욱 태경SBC 상무가 조금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2010년, 10년 가까이 이어진 워크아웃을 졸업한 이 회사는 2014년 안산공단에서 군산으로 내려왔다. 1981년 입사했다는 신 상무는 “임대료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회사가 힘들었다”며 “직원들 데리고 군산으로 내려오면서 ‘내가 책임질 테니 같이 가자’고 설득했는데 지난해부터 어깨 펴고 얘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고 말했다. 1969년 삼보아연으로 문을 연 SBC는 산업용 소재를 생산하는 중소기업이다. 아연 제품을 주로 생산한 SBC는 지난 2015년 소재 및 화학 중심의 중견기업인 태경그룹에 인수됐다. 태경SBC는 올해부터 BB크림 등 기능성 화장품 핵심 원료인 나노이산화티타늄 생산에 나선다. 국내 최초다. 연간 생산량은 240t이다. 200억원을 투자해 지난해 연말 준공한 공장 내부엔 4000L 규모의 대형 탱크 8기가 가동을 기다리고 있다. 신 상무는 “소재 기업의 장점을 살려 이산화티타늄을 생산하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지만 그동안 실험실 수준에 그쳤다”며 “태경이 인수하면서 박사급 연구원을 채용했고 개발에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태경SBC가 나노이산화티타늄 양산에 돌입하면 '탈 일본' 소재는 하나 더 늘어난다. 그동안 일본 기업(타이카・이시하라)에 대부분 의존했던 화장품 핵심 원료를 국내에서 자체 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좁쌀 모양의 나노이산화티타늄은 크기가 15~20㎚(1㎚는 10억분의 1m)에 불과한데 이를 화장품에 배합하면 자외선을 차단하는 기능성 화장품을 만들 수 있다.
일본 기업에 의존하던 자외선 차단제 원료
지난해 상반기엔 중국 화장품 기업들이 일본산 나노이산화티타늄을 몽땅 쓸어가 한국 화장품 업계에 수급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이 회사 생산연구본부장을 맡은 신 상무는 “시기가 시기인지라 개인적으로도 국산화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의 무역 분쟁을 염두에 둔 말이다. 한해 매출 800억원에 불과한 작은 기업이 '탈 일본'에 성공하기까진 꼬박 3년이 걸렸다. “지난 3년간 실험실 문턱을 4번 넘었는데 그중 3번은 대량 생산을 목전에 두고 고꾸라졌어요. 마지막에 딱 성공을 한 거예요.” 개발을 주도한 조용재 선임연구원은 이렇게 회상했다. 소재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선 건 2016년 무렵이다. “적을 알아야 나를 안다”는 표현처럼 일본산 샘플을 구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장동명 선임연구원은 “일본 기업에 소재 샘플을 직접 요구할 수 없어서 대학 실험실 등을 통해 우회해서 샘플을 구해 분석했다”고 말했다. 샘플은 일본 것을 구해 분석했지만 기술은 자체 개발한 독자 기술이다. 가장 큰 난관은 단가를 낮추는 일이었다. 이산화티타늄은 기능성 화장품에도 쓰이지만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와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등 첨단 전자 제품 생산 과정에서 쓰이는 필수 소재다. 널리 알려진 제조 공정이 있었지만, 이 회사가 전자제품용 이산화티타늄 제조 공정을 그대로 가져다 쓰기엔 생산 단가가 너무 비쌌다. 신 상무는 “널리 알려진 이산화티타늄 제조 공정을 들여오면 제품 1㎏을 만드는데 30만원이나 들어가 일본 업체가 공급하는 단가(1㎏당 6만원)에 도저히 맞출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원료 확보부터 새로운 공정을 짜야만 했다. 단가를 줄이는 제조 공정을 실험하다 실험실을 홀라당 태울 뻔 하기도 했다.
각종 규제에 발묶여 공장 건설도 더뎌
원료인 티타늄 정제 광물을 구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중국 기업 6곳에 들러 샘플을 샀으나 품질이 고르지 못했다. 조용재 선임 연구원은 “샘플의 티타늄 함량이 들쭉날쭉해 매번 여러곳을 뒤져 새로운 공급 업체를 알아봐야 했다”며 “샘플을 바꿀 때마다 개발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진행해야 했다”고 말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각종 규제로 공장 건설은 속도를 내지 못했다. 신 상무는 현장에 맞지 않는 ‘발목잡기식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 공장만 해도 작업자가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작동하고 멈추지만, 소방 등 각종 규제는 10년 전에 머물러 있다”며 “공장 내부에 칠해야 하는 페인트 종류까지 규제하고 있어 마무리 작업이 늦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태경SBC는 올해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유럽 화장품원료협회(EFfCI) 인증에 도전할 예정이다. 신 상무는 “해외 시장을 공략하려면 FDA 인증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봤다”고 말했다. 글로벌 시장 조사기관 유로모니터 등에 따르면 글로벌이 아닌 국내 자외선 차단기능 제품의 시장 규모만 따져도 4조원 수준이다. 연면적 9908㎡(약 3000평) 규모의 태경SBC 제2공장 절반은 공터다. 이 회사는 판매 실적을 살펴보고 나노이산화티타늄 생산량을 720t으로 늘리는 공장 증설에 나설 예정이다. “아모레퍼시픽·LG생활건강·콜마 등 국내 화장품 제조사에 보낸 샘플은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공장 내 공터를 안내하던 신 상무가 말했다. 온갖 난관을 겪었던 이 중소기업 임직원들에게 2020년, 희망의 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출처
강기헌,실험실 홀랑 태울뻔…日화장품 원료 국산화한 군산 중소기업,중앙일보,2020.01.01
https://news.joins.com/article/2367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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